중앙일보>소파방정환 “5월의초상”

“젊은이나 늙은이는 이미 희망이 없다. 우리는 오직 나머지 힘을 가하여 가련한 후생(後生) 어린이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자는 취지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여, 어린이들을 위하여 일하자는 날이 오늘이라 한다. 조선의 어린이여! 그들에게 복이 있으라! 조선의 부형(父兄)이여! 그들에게 정성 있으라!”

1923년 첫번째로 치러진 어린이날 행사를 당시 일간지는 그런 감격으로 전하고 있다.

요즘 가족 중심의 어린이날과 달리 꼭 80년 전인 일제 치하 어린이날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음을 암시해준다. 즉 청년운동·농민운동과 같은 맥락의 사회운동 차원이었다는 얘기다.

20대 젊은이들마저 낡았다고 제껴놓은 채 10대 어린이들을 사회변화, 민족운동의 전위로 키우려던 것이 어린이운동의 본뜻이었다. 당시 인구 30만명의 서울시내에 뿌려진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 제1회 어린이 날 선전문`은 무려 12만장이었는데, 취지문도 그런 톤이었다.

그날 오후 서울 종로구 천도교당에서 진행된 기념식 이후의 시가행진 역시 일본 기마경찰대 감시 아래 이뤄졌다. `경축 어린이 날`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운 채 고적대 행진곡에 발맞춰 파고다공원에서 광화문 일대로 나가는 가두행렬은 4년 전의 만세운동을 연상시켰다. 그것이 소파 관련 첫 평전(評傳)으로 선보인 『청년아, 너희가 시대를 아느냐』가 밝힌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1899∼1931)의 어린이 날 행사 당시의 긴장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문화비평가 민윤식(56·한국방정환재단 사무국장)이 저술한 이 평전에 따르면 소파는 어린이 날 제정 며칠전 국내 첫 소년잡지로 『어린이』를 창간했는데, 그것은 그가 준비해온 사회운동 차원의 소년운동의 신호탄이었다.

소파는 1923년 3월 신문의 광고를 통해 소년잡지 『어린이』 창간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더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여 그래도 우리가 안타깝게 무엇을 구하기에 노력하는 것은 내일은 잘될 수 있겠지 하는 한가지 희망 때문입니다. 그 희망이란 내일의 조선 일꾼 소년소녀들을 잘 키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어린이』 창간 직후 사회단체 `색동회`를 만들기로 결정(4월 14일)하고, 이와 함께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기로 결정(4월 17일)한 뒤 첫 기념식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이 대목에서 물어보자. 당시 갓 스물넷 나이였고, 8년 뒤 세상을 떠났던 한 청년이 벌인 사회운동은 왜 이토록 파급이 컸을까? 근거 희박한 몇몇 자료들을 토대로 만들어졌던 위인전 류에서 벗어난 『청년아, 너희가 시대를 아느냐』는 그것을 묻고 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또 있다. 소파는 소년운동가·아동문학가에 국한된 인물일까? 『어린이』 창간 이전 `신문 부럽지않다`는 영향력을 자랑했던 시사종합지 『개벽』 창간을 비롯해 여성잡지 『신여자』, 대중잡지 『별건곤』,영화잡지 『녹성(綠星)』 등 잡지 저널리즘을 개척한 그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런 출판운동은 일제하 사회운동과 어떤 관련을 맺고있나? 무엇보다 `사람 소파`는 어떤 스타일이었을까?

평전에 따르면 소파는 서울 토박이 출신. 종로구 당주동, 즉 세종문화회관 뒤편에서 태어났던 그는 어물전과 싸전을 하던 방경수의 맏아들이었다.

방경수는 동학운동 적극 가담자였고, 나중 청년 소파가 의암 손병희의 사위로 발탁되면서 당시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천도교 세력을 등에 업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책 속의 소년 소파는 `당돌한 꼬마`로 묘사된다. 자기 의지로 머리를 깎고 서당 다니기를 포기한 채 소학교 입학을 결정한 일화만 해도 그렇다.

태어났을 때는 여유 있었으나 갑작스런 집안 몰락 때문에 10대 내내 쌀 동냥 등 극빈 체험도 젊은 소파가 `사회주의자+민족주의자`의 양면성을 보이는 측면을 이해하게 해준다. 매동(현 매동초등학교)과 미동(현 미동초등학교)을 오갔던 보통학교 시절 그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중퇴(15세)한 선린상고 시절과 이후 총독부 토지조사국 임시직원 근무 중 그는 글쓰기와 책읽기로 `다른 꿈`을 꾸고있었다.

그를 키운 교사는 문학책과 잡지였다. 젊은 소파는 육당 최남선이 만든 잡지 『아이들보이』 『청춘』등을 읽고 투고하면서 문화운동의 꿈을 키우게 된다.

당시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의 눈에 들어 사위로 전격발탁된 과정이 흥미롭다. 우리에게 익숙한 풍채좋은 중절모 차림의 소파 모습은 결혼 뒤 처가살이를 하면서 잘 먹은 탓이고, 10대 시절 엄청 야위었던 그는 눈빛이 초랑초랑하다는 이유만으로 의암의 눈에 들었다. “천도교 청년부에 성실한 젊은이가 있다”는 추천을 한 것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권병덕.

사회활동의 날개를 단 그는 나중 언론인으로 성장한 유광렬과 함께 비밀결사단체 `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기관지 『신청년』 발행에 들어간 것이 3.1운동 전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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