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

1910  꿈 많고 장난 심했던 어린시절

1899 – 1910
꿈 많고 장난 심했던 어린시절

1899(1세)
11월 9일(광무 3년 己亥年 음력 10월 7일) 서울 야주개(당시 夜珠峴, 지금의 당주동(唐珠洞)에서 아버지 방경수(方慶洙)와 어머니 손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성부 견지동 118번지이다. 족보에 따르면 온양(溫陽) 방씨 판서공파 36대손이다. 조부 방한용(方漢龍)은 야주개 시장거리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였다. 방정환이 태어나서 아홉 살 무렵까지는 ‘대단히 큰 기와집을 하나 가지고도 부족하여 두 집을 사서 사이를 트고 한 집을 만들어 쓸’ 정도로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 넉넉함 덕분에 어릴 때는 야주개 어느 가게든지 빈손으로 가서 엿, 과자, 과일을 마음대로 집어먹을 수 있었고, 가게 주인은 그의 조부로부터 돈을 받아갔다 한다. 이때 그의 가족으로는 증조부모, 조부모, 큰고모, 작은고모, 그리고 병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 그밖에 2살 위인 누이와 삼촌, 2살 아래인 사촌동생이 있었고, 그는 외아들이었다. 족보에 따르면, 어머니 손 씨가 사망(1917년)한 뒤 아버지는 해주 구 씨와 재혼(일부 기록에서는 오 씨로 소개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5(7세)
이 무렵 한문에 조예가 깊던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이 해 봄, 두 살 위(9세)인 삼촌을 따라 서대문 근처 신식학교인 보성소학교에 놀러 갔다가 김중환(金重煥) 교장에게 붙잡혀 머리를 깍이고, 유치반에 입학했다. 당시 보성소학교는 신식학교였지만 교육과정과 내용은 전통 서당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소파는 거기서 여러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1907(9세)
종조부의 사업실패로 도정궁 밑 사직골의 조그만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이 때부터 소파의 고생 많은 어린 시절이 시작된다. 집에서 멀어진 학교를 오가야 했고 도시락을 못 싸가 점심시간에는 변소 뒤에서 배고픔을 달래며 눈물짓기 일쑤였다. 대고모댁으로 쌀 꾸러 다니기, 전당포 다니기, 겨울에 물 길어오기 등 고생이 시작되었다.

1908(10세)
총명한 소파의 재질을 눈여겨 보았던 어느 미술가가 고생하는 소파를 양자로 맞이하려 했으나 외아들이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자 환등기 한 대를 선물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소파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환등기를 비추면서 변사 흉내를 내는 등 이야기 들려주기 솜씨를 발휘하였다.
방정환의 수필 <나의 어릴 때 이야기>에 따르면, 덕수궁 대한문 맞은편에 있는 최씨 집에서 ‘소년입지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소년입지회’의 회원은 8,9명 정도였고, 10~14세 정도의 동무들이 모여 석유 궤짝을 뜯어 만든 칠판을 걸어놓고 공일날마다 간단한 토론을 했다. 이때 토론 문제로는 ‘손이 나으냐 발이 나으냐’와 같은 것이었고, 이 경험을 나중에 <어린이>의 ‘소년토론’ 문제로 내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에 8~9명이 소년들이 모여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으로 시작한 소년입지회는 점차 규모가 커져서 1910년에는 회원이 160여 명으로 증가했다. 방정환이 총대장으로 훈련원에서 대운동회를 개최하거나 대한문에서 경축행사를 가기도 하고, 장충단으로 소풍을 가고, 성북동에서 밤 줍기 행사를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12살(1910년)의 방정환이 이런 활동을 혼자 계획하고 실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재정적으로 조직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1908년 권병덕이 시천교 내에 조직한 소년입지회이다. 13세 이하의 어린이를 회원으로 1주일에 한 번씩 토론회를 개최하여 아동의 지식을 교환하도록 하였다. 권병덕은 총재로서 소년입지회의 제반 활동을 주관했는데, 시천교의 소년입지회와 방정환이 조직했다고 하는 소년입지회의 조직 시기․활동 내용․회원 자격 등에서 일치한다.

1909(11세)
사직동 매동(梅洞)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0(12세)
집이 사직동에서 근동으로 이사하여 10월 4일자로, 미동(渼洞)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였다. 방정환의 미동보통학교 학적부에는 1910년 아버지의 직업이 인쇄기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업 실패 후 인쇄소에 취직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무렵 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는 권병덕과의 인연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3(15세)
3월 25일, 미동보통학교 4학년 졸업하였다. 인쇄공장에서 연판공으로 다니시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11월 용산구 청파동에 위치한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신문화 흡수를 위해 <소년>(1908.11-1911.5)  <붉은 저고리>(1913.1-6)  <새별>(1913.9-1915.1) 등의 잡지를 탐독했다고 한다.

1914(16세)
졸업을 1년 앞둔 시점에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였다.

1915(17세)
가계를 돕기 위해 월급 5원의 총독부 토지조사국 사자생(寫字生)으로 취직하였다. 사자생은 측량사들이 측량 작업을 하면서 적어 놓은 기록과 지적도에 필요한 토지에 관한 각종 기록들을 토지조사부에 정확히 정자로 옮겨 적는 일이다. 이때 유광열(柳光烈)과 친하게 지내며, 봉놋방에 기거했고 독서에 더욱 힘썼다.

1917  청년운동가로 새로 태어나다

<신청년> (1919.1): 방정환 선생님이 청년단체 ‘경성청년구락부’를 만들고, 펴냈던 문예잡지
1917년대 천도교청년회원들
: 가운데 방정환 선생님 

1917 – 1921
청년운동가로 새로 태어나다

1917(19세)
의암의 생일인 음력 4월 8일, 천도교인 권병덕의 중매로 천도교 3대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 용화(溶嬅)(당시 17세)와 결혼했다. 이후 방정환은 천도교 내에서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1921년 9월, 일본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 제동 처가에 머물며 청년운동을 펼쳤다.
5월 6일,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918(20세)
5월 2일, 장남 운용이 처가에서 출생하였다.
7월, 보성법률상업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다.
7월 7일, 방정환, 이중각(李重珏, 李一海)의 발기로 ‘경성청년구락부’ 결성하였다. 유광렬의 회고(<기자 반세기> 서문당, 1969)에 따르면 회장에는 이복원, 부회장에는 이중각이 추대되었고, 방정환은 유광렬과 함께 그 밑에서 실질적인 일을 맡았다고 한다.
12월, 봉래동 소의(昭義)소학교에서 경성청년구락부 송년회 개최, 소인극 ‘◯◯령’을 연출하고 주연을 맡았다. ‘동원령’의 내용은 일제 침략으로 기우는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국민이 총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19(21세)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일자를 마지막으로 못 나오게 된 <조선독립신문>(사장은 보성학교 교장 윤익선, 인쇄소는 천도교 보성사)을 오일철과 함께 집에서 등사판으로 박아 배부하였고, 독립선언서(보성사에서 인쇄)를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을 받다가 1주일만에 풀려났다.
1월 20일, ‘청년구락부’의 기관지이자 문예동인지인 <신청년(新靑年)>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유광렬의 회고에 따르면, 이 잡지의 권두언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썼다고 한다.
9월 2일 창립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 간의원(幹議員)으로 선출되었다.
11월 5일, 최초의 영화 잡지 <녹성(綠星)>을 발행하였다. <녹성>의 편집 겸 발행인은 이해일(李一海), 즉 경성청년구락부 부회장 이중각으로 되어 있다.<녹성> 창간호 사고에 따르면 문의사항과 잡지주문은 경성 녹성사(경성 죽첨정 1정목 39번지)로 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 주소는 <신청년> 제2호 발행지 주소와 동일하다. <녹성>과 경성청년구락부가 어떤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두 잡지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방정환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1920(22세)
3월, 여류시인 일엽 김원주의 요청으로 류광열, 김활란, 박인덕, 신준려(신줄리아) 등과 함께 <신여자(新女子)>지의 창간 동인이 되었다.
장녀 영화 태어났다.
4월 25일, 천도교 교리강연부의 명칭을 천도교청년회로 개정하였다.
6월 13일, 보성전문학교 대강당에서 문예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모르스 르블랑의 탐정소설 <813>을 구연하였다.
6월 30일, ‘천도교청년회’ 문천(文川)지회 주최 특별 강연회에서 ‘개벽선언’을 강연했다.
7월 2일, 원산 동락좌에서 ‘천도교청년회’ 주최 강연회에서 ‘세계평화는 인내천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7월 6일~22일까지 ‘천도교청년회’ 주최로 서울, 문천, 장연 등지에서 모임을 갖고, 이어 27일~ 8월 9일까지 ‘조선학생대회강연단’의 일행으로 순회강연을 하였다.
7월 28일에는 ‘현금시세와 정신의 개조(現今時勢와 精神의 改造)’라는 제목으로 개성의 송도보통학교에서 강연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로 임시 개정하여 ‘자녀를 해방하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7월 30일, 평양 남산현 장대현 예배당에서 ‘노력하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8월 2일, 선천. 신성학교 기숙사에서 ‘각성하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8월, 25일, 필명 잔물로 ‘어린이 노래: 불켜는 이’를 번안하여 <開闢>3호에 발표했다. 이 때부터 소파는 ‘어린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9월 13일 경 <개벽> 도쿄 특파원과 천도교청년회 도쿄 지부의 회장직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고 이때부터 1923년 11월 완전히 귀국하기까지 조선과 도쿄를 왕래하며 활동했다. 9월 중순~ 1921년 3월까지 철학과 ‘특별청강생’(학급에 구애되지 않고 임의로 학과를 청강할 수 있는 학생)이었다.

1921(23세)
2월 말 ~ 3월 초, 양근환의 민원식 암살 사건(1921.2.16.)에 연루되어 천도교청년회 도쿄지부 전원이 10여일 간 감옥에 갇혔다.
4월 9일~1922년 3월 30일까지, 토오요오(東洋) 대학 전문학부 문화학과에 ‘청강생’(학급을 정하여 청강하는 보통 청강생)으로 등록하였다. 동기생으로 신영철, 고한승 등이 있었으며, 당시 이 대학 청강생으로 조선학생 40여 명이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동경유학생순강단’ 일행으로 6월 17일(부산 도착)부터 한 달여간 순회 강연을 하였다.
6월 18일, 부산 천도교청년회 주최 강연회에서’잘 살기 위하여’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6월 20일, ‘동경유학생순회강연단’의 일행으로 논산에서 교육발전에 대해 강연했다.
6월 22일, 호남선 지경역 앞 천도교구에서 ‘잘 살기 위하여’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6월 31일, 김제 강연에서’잘 살기 위하여’라는 연제로 강연. 언론 중 치안에 저촉된다고 하여 강연 도중 중지 산회되었다.
7월 4일, 강경 강연회에서’잘 살기 위하여’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7월 12일, 천도교동경지회 강연단 서흥 강연회에서’잘 살기 위하여’란 연제로 강연. 경관의 강연 중지로 산회되었다.
7월 15일, 천도교동경지회 강연단 사리원 강연회에서 ‘잘 살기 위하여’란 연제로 강연.
7월 18일, 안악 강연회에서 동경에서 부산까지의 상륙 소감을 약술하고 ‘잘 살기 위하여’로 강연을 하려 했는데 경찰 서장의 돌연 중지로 폐회되었다.
7월 25일, 해주 강연회에서 ‘잘 살기 위하여’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8월 6일, 송화 강연회에서 ‘잘 살기 위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8월 30일~31일,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청년들로 조직된 일본유학생단은 평양 가부기좌에서 참회의 극 <식객>을 연출하였다.
11월 10일,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장으로서 태평양대회를 계기로 청년을 선동하여 저항운동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박달성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2(24세)
1월 6일 <동아일보> 6면에 ‘작가로서의 포부, 필연의 요구와 절대의 진실로’라는 제목으로 소설가로서 지켜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적고 있다.
이 무렵 소파의 거주지는 東京 小石川區 仲富坂町 十九番地 일본인 집의 2층이었으며, 그의 방에서 동경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3월 30일, 일본 토오요오 대학을 퇴학했다.
3월, 그의 장인인 의암이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5월 19일 서거하였다.
7월 12일, 천도교장연교구 주최 강연회에서 ‘새 살림 준비’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9월 2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천도교청년회 창립 3주년 기념식 강연회에서 강연하였다.

1921  어린이운동을 준비하다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 번역동화집 <사랑의 선물> (개벽사, 1922)

1921. 2 –
어린이운동을 준비하다

1921(23세)
2월 동화 <왕자와 제비>를 번안하여 발표하고 ‘동화를 쓰기 전에 어린애 기르는 부형과 교사에게'(<천도교회월보> 1921.2)를 발표하면서 이른바 ‘동화 작가 선언’을 한다. 아동문학과 소년운동에 뜻을 두고 활동을 전개할 뜻을 처음 밝힌다.
5월 1일, 개벽사 주간인 김기전, 이정호와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였다. 발족 당시 회원은 남녀 30여 명이었으며, 이 해 10월에는 370여 명으로 회원이 늘었다.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란 표어를 걸고, 어린이에게 존대말쓰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조직화, 체계화시킨다.
7월 10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소년강연회를 열었다.
11월 29일, ‘천도교소년회’ 어린이 회원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내려와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쿄에 도착하였다. 이때의 유학은 일본의 토오요오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연말에 일본에서 안델센 동화, 그림 동화, 오스카 와일드 동화 등을 번안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번역하여 엮었다. 이 책은 1922년 7월 7일 개벽사에서 발간되어 10판까지 찍히는 대호평을 받았다. 소파 생전의 유일한 단행본이다.

1922(24세)
5월 1일,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 기념으로 제1회 ‘어린이의날’을 제정하였다.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라는 전단을 뿌리며, 크게 이 날을 선진하였다.
6월 29일, 인천 가부기좌에서 소년소녀가극회 개최. 천도교청년회도쿄지회장 방정환은 ‘소년회 조직 필요’에 대해 강연하였다.
7월, <사랑의 선물>을 개벽사에서 출간하였다.
9월부터 <개벽>과 <부인>에서 전래동화 모집 운동을 전개하였고, 방정환은 이때 작품 선정을 맡았다.
12월 25일, 천도교소년회 강연회에서 ‘생활개조와 아동문제’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12월 30일, 천도교소년회 환등강연회에서 강연하였다.

1923(25세)
1월 14일, ‘천도교소년회’ 주최로 ‘한네레의 죽음'(2막), ‘별주부전'(2막)이란 제목으로 동화대회를 열었다. 방정환은 ‘열두 달의 손님’이라는 동화를 구연하였다.  

1923. 3  방정환과 <어린이>지

<어린이> 창간호 (1923. 3. 20):  신문 크기 타블로이드판
색동회 창립 (1923. 5.1): 방정환 선생님이 도쿄 유학 시절, 어린이 문화연구단체 ‘색동회’ 조직

1923. 3. 20
방정환과 <어린이>지

1923(25세)
2월 18일, <어린이> 창간 기념 가극대회를 열었다.
3월 16일, 도쿄의 소파 하숙집(센다가야 온덴 101번지)에서 아동문제연구회인 ‘색동회’의 창립을 위한 모임이 소파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 때 모인 사람은 강영호, 손진태, 고한승, 조준기, 진장섭, 정병기 등 8명이었다.
3월 20일, 소파가 심혈을 기울인 <어린이>창간호가 발행되었다.
3월 30일, 도쿄의 정병기 하숙방에서 ‘색동회’가 창립되었다. 이때, 소파의 권유로 윤극영이 가담하였다.  4월 14일의 제3차 회합을 거쳐, 5월 1일 발회식을 가졌다.
4월 17일, 천도교당에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조직되었다. 천도교소년회,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이 중심이 되어 연합행사를 벌였다.
4월 28일, 도쿄에서 ‘소년문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5월 1일,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의 제1회 ‘어린이날’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날 ‘어른에게 드리는 글’,’어린동무에게’, ‘소년운동의 기초조항’, ‘어린이날의 약속’등의 선전문이 시내에 뿌려졌다.
7월 23일, 색동회와 어린이사의 공동 주최로 ‘전선소년지도자대회’를 일주일 동안 개최하였다.
9월 2일, ‘천도교청년당’이 창립되어 유소년, 청년학생, 여성, 농민, 상민, 노동 등 여러 부문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소파는 이 ‘청년당’의 유소년부 위원이었다.
9월 22일, 천도교당에서 가을놀이 ‘소년소녀대회’가 열렸고, 소파는 여기서 동화구연을 했다. 방정환이 <어린이> 창간호에 실은 동극 ‘노래주머니’가 동화극으로 상연되었다.
11월 18일, 25일 저녁, 경성도서관에서 소파동화회가 열렸다.

1924(26세)
1924년 1월부터<어린이>에 ‘자유화모집’ 공고를 내는데, 이는 일본의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 키타하라 하쿠슈우(北原白秋) 등의 예술교육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인다. ‘자유화’에 대한 주장은 특히 야마모토 카나에가 1921년에 펴낸 <자유화교육(自由書敎育)>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경성도서관 주최로 매 공일날마다 소파의 동화회를 열었는데, 매번 대만원이었다.
3월 18일, 색동회의 정순철, 정병기, 강영호와 함께 개성 샛별잡지사를 방문했고, 18, 19일 에는 북복교 예배당에서 ‘산드룡이야기’, ‘내어버린 아이’를 구연했다.
4월 21일, 개벽사에서 각 소년회 대표들이 모여 제2회 어린이날 기념선전 준비회를 열었는데, 이때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5월 1일~ 4일까지 여러 가지 어린이날 행사를 벌였다. 5월 1일은 어린이 대회를, 5월 2일은 어머니 대회, 5월 3일에는 아버지 대회, 5월 4일에는 노동소년 위안회 및 원유회가 열렸다. 이때 각 지방 12개 처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렸다. 소파는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후원했다.
6월 15일, <어린이>애독자와 어린이사 직원과 함께 동물원에 소풍을 갔다. 여기서도 소파는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었다,
이 무렵 언양의 신고송, 서울의 윤석중, 마산의 이원수 등이 <어린이>애독자로서 많은 글을 투고하고 있다.
8월, 소파가 중심이 되어 제2회 전국소년지도자 대회가 천도교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전국의 140여개의 단체가 참가했다.
다음해부터는 소파가 <어린이>지의 일에만 전념하기로 결정되었다고 <어린이>2권 12호의 편집후기에 적혀 있다.
10월 12일, 홍성 유치원 주최 유원(幼園)동화대회에 출연하였다.

1925(27세)
신년호 <어린이>지가 당시 잡지로서는 유래 없는 3판까지 발행되어 소파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신년호부터 소파는 탐정소설 ‘동생을 찾으러’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필명은 북극성(北極星)이었다.
<어린이>2월호에 처음으로 ‘세계소년작품전람회’를 연다는 공고가 나간다.
이 무렵 소파는 사진기를 사가지고 찍는 법을 배우게 되는데, 이는 다음에 사진소설을 내는 데 활용하게 된다.
이즈음 토요일마다 천도교기념관에서 소파의 동화회를 열었는데, 입장권을 1,000매를 만들어 분배하지만 늘 2,000여명씩 와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는 사태가 생겼다.
3월 20일~ 30일까지 <어린이>창간 2주년 기념행사로 서울을 비롯한 대구, 마산, 부산, 김천, 인천에서 ‘소년소녀대회’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 소파는 동화를 구연했으며, 선전포스터에도 ‘방정환씨 출장 참석합니다’라는 문구를 넣었으니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4월 29일, ‘제3회 어린이날’ 전야제를 어린이사와 색동회 주최로 천도교기념관에서 열었다. 이때 소파는 동화 ‘귀만의 슬픔’과 ‘어린이날 이야기’를 강연했다.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를 다채롭게 열었다. 깃대행렬을 비롯하여 선전삐라를 뿌렸고, ‘우리의 희망은 어린이’, ‘앞날의 임자는 어린이’, ‘내일을 위하여 어린이를 키우자’ 등의 글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가행진도 했다. 이때 소파가 작사한 ‘어린이날 노래’를 소년군취주악대의 반주에 맞추어 부르며 행진했다. 그런데 깃대행렬의 경우는 깃대의 색깔이 붉은색이어서 일제는 불온하다는 이유로 허락지 않아서 오후 4시에야 행렬이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외에도 강연회, 동화회, 여흥회 등의 행사가 푸짐하게 열렸다.
6월 16일~6월 26일, 오월회 주최로 열린 ‘소년문제강연회’에서 방정환은 ‘지도자강습회 강사’로 선정되어 강연하였다.
이 무렵 <어린이>판매부수가 3만부 정도가 되어 당시로서는 최고의 판매부수를 자랑하게 되자 ‘10만 어린이독자’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8월 26일, 어린이사 주최로 서울의 교통량을 조사하였다.
9월호부터 <어린이>책값이 10전에서 15전으로 인상되었다. 그에 대하여 소파가 어린이들에게 하는 ‘괴로운 보고’가 ‘사랑하는 <어린이>독자여러분께'(편집인의 부탁)등이 있다.
이 무렵부터 <어린이>지는 국내에는 물론, 해외에서도 자사까지 있어 일본, 중국 등지에서도 읽혔다.
<어린이>지의 부록 <어린이신문> 제1호가 11월호 부록으로 배부되었다.

1927(29세)
<어린이>1월호부터~1930년 12월까지 모두 20회에 걸쳐 ‘어린이 독본’을 연재하였다. ‘어린이 독본’은 일종의 도덕교과서이며, 실제로 당시의 많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쓰이기도 했다.
<어린이>3월호부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작소설(매 호마다 다른 필자가 등장하여 같은 주제의 글을 릴레이 형식으로 쓰는 소설)인 ‘오인동무’를 싣게 된다. 마해송, 고한승, 진장섭, 손진태, 정인섭, 최진순, 정병기 등이 참여했으며, 소파가 끝을 맺기로 계획되었으나 정병기의 작품으로 끝을 맺었다.
3월까지 <어린이>지의 부록 <어린이 세상>이 16호째 나가고 있었으며, 이 난을 통하여 소년운동소식을 계속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를 불허했다. <어린이 세상>에서는 작문, 동화, 일기, 유희, 지식, 소개, 담화실 등의 난이 있었다.
3월 26일, <어린이> 창간 4주년기념으로 열린 동화동요동화극 대회에 출연하여 동화 구연을 하였다.
<어린이>5권 8호부터 다시 책값을 종전의 10전으로 내렸다. 대신 부록 가운데 컬러 사진 은 빠지게 되었다.
이 해 <어린이>는 4개월이나 빠져 총 8개월 밖에 발행되지 못하였다.

1928 (30세)
<어린이>신년호에 이정호의 ‘귀여운 희생’, 최규선의’少勇士의 특명’등을 비롯하여 여러 글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압수 명령이 내리고, 온 조선 300여 곳에 이미 배포되어 있는 책을 모두 몰수당하였다. 이때 <어린이>지는 폐간당할 위기까지 맞았으며, 소파는 날마다 총독부에 들어가 이의 해결을 위해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2월 11일~12일, 색동회 주최, 어린이사 후원으로 열린 아동문제강화회에서’아동연구에 관한 기초지식’과 ‘아동 교양에 필요한 동화 지식’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10월 2일~10월 10일까지 천도교기념관에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했다. 이 전람회는 1925년부터 계획된 것으로 <어린이>사가 주최하고 색동회가 주관을, 동아일보 학술부가 후원을, 재경해외문학부가 협찬을 각각 맡았다. 소파의 예술운동 중 가장 성대한 행사였다.
10월 12일, 동아일보에 ‘경과보고와 감사’를 실어 ‘세계예술전람회’의 뒷소식을 적었다.
<어린이>6권 6호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 기념특집호’로 꾸며졌다. 이 호에 실린 소파의 글은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면서'(기념사), ‘세계일가(어린이 독본)’, ‘눈물의 작품'(미담) 등이 있다.
<어린이>6권 6호부터는 ‘재래동요모집’ 특별공고를 내어 전래동요 발굴에 착수한다.
이 무렵 <어린이>에 대한 총독부의 검열이 까다로워 매호 몇 편씩의 글이 삭제 당했고, 소파의 강연회, 동화회 등도 금지되었다.

1929(31세)
<어린이>3월호를 ‘조선자랑호’로 꾸미었다. 여기서는 ‘조선자랑가’를 비롯하여, 조선의 지리, 기후, 온돌, 특산, 산수, 의복, 인정, 동요, 힘, 도량, 담력, 서화, 음악, 운동, 어학 등을 자랑하고 있다. 이 호에서 소파는 ‘모두 합하여(어린이 독본)’를 발표했지만 전문을 삭제 당했다.
<어린이>7권 4호는 거의 대부분의 원고가 삭제당하였는데 소파의 글로는 ‘어린이날을 맞으며'(훈화), ‘어린이 독본’,’이엽초(二葉草)'(사진소설)가 전문 삭제되었다. 이 무렵 <어린이>지와 일제는 첨예한 대결을 하게 되는데, <어린이>지는 여러 형태의 글로써 민족정신 고취에 열을 올리고, 일제는 그것을 삭제와 압수와 불허로 막는다.

1930(32세)
<어린이>3월호는 ‘창간 7주년 기념호’인 동시에 ‘조선제일호’로 꾸몄다. 여기서는 조선에서 제일 큰 산, 강, 책, 종을 비롯하여 제일 오래된 건물, 제일 쌀 많이 나는 곳, 금 많이 나는 곳, 덥고 추운 곳 등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했다. 이 호에서 소파는 ‘7주년 기념을 맞으며’, ‘조선 제일 짧은 동화’등의 글을 발표했다.
이 무렵 많은 <어린이>지사와 분사가 전국 곳곳에 새로 설치되었다. <어린이>지에 소개된 것만 보면 박천지사. 김천분사, 김양분사, 삼남분사, 신풍분사, 구미분사, 덕천지사, 남원지사, 철원분사, 원산천지사, 혜산진지사, 강진지사, 하얼빈지사, 감읍지사, 온천지사, 회천지사, 신갈파분사, 서강지사, 강동지사, 청진지사, 영동지사, 상가분사, 하도분사 등이 있다. 또 신갈파지사에는 현지 기자도 두었다.
이 무렵 <어린이>지의 평균 발행부수는 삼만부를 상회했으며, <별건곤>이 삼만부 정도, <학생>이 만부를 발행한다는 社告를 <어린이>10주년 기념호에 냈다.
11월, 잡지사 일로 다시 일본에 들어갔다.

1923. 11  귀국 후 개벽사 시절의 방정환

개벽사 발행 잡지와 단행본(<어린이>, 1930.7) / 잡지 <개벽> 폐간 항의 사진 (1926년 8월)

1923. 11 –
귀국 후 개벽사 시절의 방정환

1923(25세)
1923년 늦은 가을, 11월 경 완전 귀국한다.

1924(26세)
봄에 충남 홍성으로 이사했다. 평소 생활은 서울 개벽에서 하고, 가끔 기차편으로 홍성의 집으로 갔다.
1월 18일, 노산 이은상의 안내로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를 방문하여 동화 ‘아버지의 병간호’, ‘헨젤과 그레텔’을 구연하였다.
3월부터 <신여성(新女性)>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개벽사에서는 <개벽>, <어린이>, <신여성>을 개벽사의 3대 잡지로 육성하였다.

1925(27세)
1월 13일, 차남 하용이 출생하였다.
2월 22일, ‘천도교청년당’ 선전 강연회에서 ‘살아날 길’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6월 30일, 마포청년회 주최, 오월회 후원으로 열린 어머니대회에서 소년문제에 관해 강연하였다.
7월 12일부터 <조선일보>에서는 학예란에 ‘어린이신문’이라는 난을 만들어 동화, 동요, 전설 등을 싣는데, 1926년 3월까지 소파가 집필했다.
7월 13일부터 10여일간 울산, 포항, 경주, 대구 등지에서 소파의 동화회, 소년문제 강연회가 정순철의 동요회와 같이 열렸다. 이즈음 소파는 밑으로는 부산에서 위로는 압록강까지 전국 각지를 다니며 소년문제를 강연했으며, 또 각지의 소년회에서 소파를 초청하려고 애썼으나 소파는 일이 너무 바빠 초청에 일일이 응할 수가 없었다.
7월 15일~17일, 소년소녀 동요동화회에 참여(방정환의 동화, 정순철의 동요) 7월 15일부터 울산 지역 공립보통학교에서 소년문제 강연과 소년소녀동요동화대회. 방정환 정순철 초청하여 소년소녀동요동화회, 방정환은 ‘신생의 도’라는 연제로 소년문제 강연회, 부인 본위로 육아아동문제 강화회 등 3일간 연속 개최되었다.
8월 6일, 재경 용천학생 친목회 주최, 용암포 상무회와 동아일보 후원으로 연 동화회에 참여. 저녁에 ‘소년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8월 7일, 양시기독교여자 청년회, 조선·동아일보 후원으로 기독교예배당에서 강연하였다.
11월 15일, 각 소년회연합 주최로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열린 ‘어린이놀이’에서 동화 구연하였다.
12월 5일, ‘개성 천도교소년회’ 주최로 소파를 초청하여 열려던 동화회가 일제 당국에 의해 금지당했다.
12월 12일, 청진동 예배당에서 열린 ‘어머니 대회’에서 강연을 했다.
5월 23일, 정홍교의 주도하에 ‘경성소년지도자연합발기총회’를 열었으며, 5월 31일에는 이 회의 명칭을 ‘경성소년총연맹’으로 바꾸고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 명칭을 허가하지 않아 ‘오월회’라고 바꾸었다. 소파는 처음에는 ‘오원회’의 위원이 되기도 했으나 이 회가 무산계급 운동을 표방하는 까닭에 탈퇴하게 되고, 급기야 당시의 소년운동은 정홍교의 사회주의 소년운동과 소파의 민족주의 소년운동으로 양분된다.

1926(28세)
1월 5일, 경성 여성동우회와 문화소년회 주최로 시내 청진동 회중교회당에서 열린 ‘어머니와 소녀회’에서 실제 가정생활 개선 관련 강연을 하였다.
2월 21일, 취운소년회 주최의 동화회에 출연하였다.
3월 20일, ‘선우소년회(鮮友少年會)’에서 소파를 초청하여 신춘동화대회를 열었다.
제4회 어린이날 생사는 소파의 민족 진영과 정홍교의 사회주의 진영이 각각 따로 준비하였으나 순종의 국장일과 겹쳐서 무산되었다. 정홍교의 오월회에서는 추석에 어린이날 행사를 거행하였다.
6·10만세사건으로 일제의 의해 예비검속을 당하였다. 소년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음력 5월 1일인 이 날에 제4회 어린이날 행사를 하기로 했으나 공교롭게 또다시 순종의 국장일과 겹쳐 이래저래 행사가 무산되었다.
이 무렵 소파는 이사를 하기 위해 집을 물색하고 다녔으나 여의치 않았다.
소파의 <사랑의 선물>이 10판 발행을 돌파하였다. 당시로서는 큰 기록이었다.
8월 25일, 어린이사 주최, 조선일보 후원으로 천도교당에서 열린 동화동요등극대회에 출연하였다.
9월 26일, 현대소년구락부 50회 기념 동화회에 초청되었다.
10월 3일, 현대소년구락부에서 개최한 어머니 대회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10월 5, 6일 <동아일보>에서 그가 독자의 이름으로 발표한 동요 ‘허잽이’에 대한 표절논쟁이 있었다. 문병찬은 ‘어린이가 지은 동요를 훔쳐 자기 것으로 만든 몰염치한 표절작가 방정환’이란 글을 실어 공격했으나 소파는 그 글이 다른 사람의 글이 아닌 자신의 필명이었음을 밝혔다.
10월 16일, 별나라 주최 동화회에 이정호, 고한승, 정홍교와 함께 참석하였다.
소파가 어릴 때 조직한 ‘소년입지회’에서 토론한 문제들을 다시 <어린이>독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지상 토론회를 벌인다. 제1회 토론문제는 ‘산이 좋은가, 바다가 좋은가’였다.
소파가 병으로 지방으로 휴양을 가 관계로 <어린이>10월호는 이정호가 편집하였다.
11월 13일, ‘천도교소년회’ 동화회에 출연했다.
11월 20일, 서강 의화 소년단 주최, 별나라 신소년사 후원으로 연 가정교육에 관한 강연에 참가하였다.
11월 26일~ 11월 30일, 의주군 천도교종리원에서 개최한 ‘제 4회 강도회’에서 이돈화와 함께 강연하였다.
11월 27일, ‘중앙선데이스쿨’ 동화회 주최의 동화회에 출연했다.
12월 12일~13일, 영동소년회에서 개회한 동화 동요대회에 정순철과 함께 참가하였다.
12월 18일, 문예운동사 주최 조선일보사 후원의 문예대강연회에서 ‘소년문학의 雜感’을 강연했다.
12월 24일, 천도교청년당 긴급위원회의 천도교 구파 검토 대연설회에서 구파 위원의 의절 변경과 천도교청년당의 대책 마련에서 ‘5세 교주는 또 누구냐’라는 연제로 연설하였다.

1927(29세)
2월 16일부터 경성방송국에서 한국어, 일본어 혼합 단일 방송이 시작되자 그 다음날 소파가 ‘어린이와 직업’이란 제목으로 라디오 방송을 하였다.
3월 17일, 경운동 천도교청년당본부에서 해월 탄생 백년 기념일 축하 강연 및 기념식, 동화 구연에 방정환은 ‘소년고수’를 구연하였다.
4월 20일, 백상규, 김명순의 필화사건으로 개벽사의 차상찬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1주일간 구금되었다.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는 전 해에 이어 다시 민족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분리되어 각자 거행하였다.
8월 7일~8월 9일, 경성방송국에서 ‘DK의 연속동화’로 아라비안나이트의 한 이야기인 ‘흘러간 삼 남매’를 방정환, 고한승, 이정호가 3일간 나누어 구연하였다.
이 무렵 <어린이>발행이 안정되지 못하였고, 9월에는 소파의 건강도 많이 악화되어 2주일 이상을 앓아누워 있게 된다.
9월 8일, 무궁화사 주최로 열린 동화대회에 정홍교 등과 함께 출연했다.
10월 7일, 사리원 동화회 주최 동화회에서 아동보육에 책임을 가진 부형에게 간단한 강연 후 동화 구연을 하였다.
11월 1일, 진주 청년회 주최 동화회에 참여하였다.
10월부터<별건곤>에서 손을 떼고, <어린이>에만 전념하려하지만 개벽사 출판운동 전체에 대한 일제의 검열이 심하여 삭제되는 기사가 많아, 편집일을 맡고 있는 소파로서는 악전고투의 시기였다.
10월 16일, 드디어 민족진영의 ‘소년운동협회’와 무산소년 운동단체인 ‘오원회’가 통합하여 ‘조선소년엽합회’를 창립하게 된다. 소파를 위원장으로 뽑고, ‘어린이날’을 다음해부터 5월 첫 일요일로 할 것을 결의했다.
지금까지의 ‘어린이날’이었던 5월 1일이 노동절인 ‘메이데이’와 겹치고, 일제가 평일에 학생 동원을 방해하여 행사를 치르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결의했다. 또 이 날 결의사항으로는 소년회원의 연령을 18세로 제한하는 것도 있었다.
11월 9일, ‘화성소년회’ 주최의 동요 동화대회가 조선일보 후원으로 수원공회당에서 열렸는데, 소파는 여기서 동화구연을 했다.
11월 25일, ‘강화소년군’ 주최의 동화회와 소년문예강연회에 참석하여 강연을 하였다.
12월 30일~12월 31일, 안악소년회에서 강연하였다.

1928(30세)
2월 7일, ‘조선소년연합회’ 주최로 ‘어머니대회’를 개최하고, ‘소년운동과 가정교양’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2월 11일, 개벽사 주최 동아일보 후원의 남녀 각학교 졸업생 강연회에 참석하여 개회사를 하였다.
3월 4일, ‘안주천도교청년회’ 주최의 동화대회에 출연했다.
3월 5일, 신의주천도교학생회 주최로 신선좌에서 열린 동화회에 출연하여 동화 구연과 ‘신생의 도’를 강연하였다.
3월 25일, 천도교기념관에서 ‘조선소년연합회’의 제1회 정기총회를 열어 회의 명칭을 ‘조선소년총동맹’으로 바꿀 것을 결의했다. 또 3월 26일에는 신임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사회주의 노선을 구체화시켰다. 이에 소파와 색동회 인사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회를 탈퇴했다.
4월 14일, 차녀 영숙이 출생하였다.
5월의 첫째 일요일에 열린 제6회 ‘어린이날’에는 천도교기념관에서 1,500여 명의 어린이들이 모인 가운데 기념 어린이 동화대회를 개최했다.
5월 7일, 견지동 신천교당에서 열린 부형모매회에서 강연하였다.
6월 2일, 시흥군 용흥청년회 주최 강연회에서 강연하였다.
7월 7일, 천도교기념관에서 조선농민사 주최로 열린 농촌문제 강연회에서 ‘귀향하는 학생제군에게’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8월 4일, 용산천도교종리원 주최 강연회에서 ‘시대를 타는 인물’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9월 14일, 광화문예배당에서 열린 동화대회에서 구연하였다.
9월 27일, ‘천도교소년회’ 주최로 천도교기념관에서 추석맞이 동화대회에 출연하였다.
10월 27일, 북감리교 ‘엡윗청년회’ 주최의 동화 동요대회에 출연했다.
12월 15일, 숭의동 애조소년회 후원회 주최 강연회에서 ‘신생의 도’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2월 16일, ‘오월회’의 핵심 구성원들이 ‘경성소년연맹’을 창립했다.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렸던 이 해의 어린이날 행사는 ‘조선소년총연맹’의 주관하에 전국적으로 거행되었다.

1929(31세)
1월 5일, 화성소년회 주최로 수원에서 연 동화회에 출연했다.
1월 18일부터 ‘신우회(新友會)’ 본부 주최로 열린 연강순회(沿江巡廻) 동화대회에 출연했다.
2월 14일부터 천도교기념관에서 ‘별탑회’ 주최로 열린 동화 동요대회에 출연했다.
2월 21일, 평양 천도교소년회 주최로 열린 동화회에 출연하였다.
2월 23일, 당면문제 강연으로 ‘신생의 도’를 강연하였다.
2월 23일, 선천 특별 강연회에서 ‘잘 살기 위하여’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3월 1일, <어린이>지가 창간된 지 만 6년만에 <학생>이 창간되었다. 소파가 실질적으로 편집 일을 보았는데 경영상 적자를 각오하고 출발했지만 1930년 11월, 통권 12호로 단명하였다.
4월 19일, 천도교학생회 주최의 신입생 환영강연회에서 ‘중학공부 시작할 때’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5월 3일~14일까지 <조선일보>에 전 6회에 걸쳐 ‘조선소년운동의 역사적 고찰’을 발표했다.
5월 13일~15일까지, 천도교 내수단 주최의 아동보육강연회에서 13일 ‘어린이의 심리 생활’을, 14일 ‘어린이가 크는 여러 시기’를, 15일 ‘꾸짖는 법, 칭찬하는 법’을 강연하였다.
6월, 연성흠이 세계명작동화 17편을 엮어 만든 <세계명작동화보옥집>을 이문당에서 출판했는데, 이 글의 서문을 소파와 이정호가 썼다.
6월 2일,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소년소녀현상 동요대회’에서 심사를 보았다.
6월 4일, 당주동에 있는 신우경성지회 주최 조선일보 학예부 후원으로 열린 소년문예강연에서 ‘조선소년문예운동의 사적 고찰’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6월 21일, 광희문예배당에서 열린 백의소년회 주최 어머니대회에 출연하였다.
9월 17일, 어린이사 주최의 ‘추석놀이대회’가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렸으며, 여기 출연했다.
9월 21일, 대구 복명유치원 주최, 조선일보 대구지국 후원하에 열릴 예정이던 방정환 동화회가 당국에 의해 금지당했다.
11월 4일, 천도교포덕선전강연회에서 ‘우리의 목적’이란 연제로 강연하였다.
11월 23~24일, 천도교청년당 동경부유소년부 주최로 동교 동경종리원에서 방정환 초청 소년문제 강연회를 열었다.
신영철이 번역한 <현대세계소학독본>(전 4권)이 6,7월 사이에 문화서관에서 출판되었으며, 소파는 이 책의 교열자의 한 사람이었다.
‘색동회’ 회원 정순철의 동요집<길잎피리>제1집이 문화서관에서 출간되었는데, 그 중 ‘여름비’는 방정환이 번역한 시이고, ‘나뭇닢배’, ‘늙은잠자리’두 곡은 방정환이 작사한 것이다.

1930(32세)
2월 10일, ‘천도교평양소년회’ 주최의 신춘동화대회에 출연했다.
2월 15일, ‘화도유년주일학교’로 주최로 인천에서 열린 동화동요대회에 출연했다.
2월 19일, 대구 복명유치원 주최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삼지국 후원으로 만경관에서 열린 동요동화회에 출연하여 동화 구연과 아동보육 강연을 하였다.
2월 25일, 평양천도교소년회 주최 중외일보 지국 후원으로 평양동화대회에서 구연하였다.
4월 12일, 시내 연건동 명진소년회 주최로 12일 ‘어린이사’ 방정환 동화회를 개최하였다.
5월 3일, 천도교 소년 기념 동화회에 출연하여 ‘불쌍한 남매’를 구연하였다.
6월 1일, 천도교청년당경성부는 우이동에서 천도교 단오놀이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7월 22일, 경성중앙보육학교 동창회 주최 조선일보 학예부 후원의 제 3회 율동유희하기강습회에서 동화와 수영을 강연하였다.
9월 21일, 대구 복명유치원 주최 조선일보 지국 후원의 방정환 동화회가 금지되었다.
10월 28일, 수운기념강연의 연사로 참여하였다.
11월 1일, 천도교청년당 주최 포덕대강연회에 강사로 참여하였다.

1931(33세)
어린이사의 사무실이 천도교기념관 윗층으로 옮겼다.
2월 25일, 여자체육장려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조선 여자와 체육’이란 연제로 강연하였다.

1931  어린이, 영원한 벗을 잃다

방정환 선생 묘비 (동심여선): 망우역사문화공원 
장례식: 1931년 7월 25일 천도교대강당 앞마당

1931
어린이, 영원한 벗을 잃다

1931(33세)
7월 23일, 6시 45분, 친구들에게는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하는 말을, 자식들에게는 “공부 잘 해야지” 하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여보게, 밖에 검정말의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왔으니 어서 가방을 내어다주게”란 동화 같은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개벽사와 색동회 주관으로 25일, 천도교당 앞마당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7월 26일, 색동회에서 소파추도식을 가졌다.
8월 20일 발행된 <어린이>9권 7호가 ‘고방정환선생추도호’로 꾸며졌다. 이정호가 7월 25일 영결식장에서 읽은 추도사 ‘오호!! 방정환 선생’을 비롯하여 각계 인사들의 애도사, 이원수, 윤석중의 추모의 노래, 소파의 일화 등이 실렸으며, <어린이>5권 8호에 실렸던 ‘어린이 독본: 너그러운 마음’이 소파를 기리는 마음에서 다시 실렸다.

1936(5주기)
7월23일, 홍제동 화장터에서 5년을 묵던 유골이 망우리 아차산 묘지에 안장되고, 색동회 창립동인 몇 후속동인인 정순철, 마해송, 최영주, 윤석중, 이정호, 장남 방운용 등에 의하여 ‘동심여성(童心如仙), 어린이의 동무 소파 방정환지묘(小波 方定煥之墓)’라는 자연석 묘비가 세워졌다.

1940(10주기)
5월1일, 10주기를 맞아 최영주, 마해송에 의해 <소파전집>이 박문사에서 500부 한정판으로 출판되었다.

1957(26주기)
소파를 기리기 위해 새싹회에서 소파상을 제정했다.

1962(31주기)
8월25일, 을유문화사에서 <소파 방정환 독본>이 간행되었다.

1965
11월30일, 삼도사에서 <소파아동문학전집>(전5권)을 간행하였다.

1969
3월 1일, 을유문화사에서 <소파수필선>을 간행하였다.

1971(40주기)
7월 23일, 색동회에서 남산공원에 ‘소파 방정환상’을 건립하였다.

1974
4월 30일, 문천사에서 <소파 방정환 문학전집>(전8권)이 간행되었다.

1976
9월 28일, <어린이>지 영인본(전10권)이 보성사에서 간행되었다.

1978
10월 20일, 정부에서 소파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1980
8월 14일, 정부에서 소파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981(50주기)
7월 23일, 소파 환원 50주기를 맞아 ‘색동회’ 등 24개 유관문화단체가 공동으로 추모행사를 구성하여 천도교 대교당에서 ‘소파 방정환선생 50주기 추모회’를 열었다.

1996
6월 7일, 소파방정환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종찬)가 설립되었다.
12월 10일, 소파방정환선생기념사업회 산하에 방정환연구소(초대소장 이종찬)를 설치하였다.

1997
10월 20일, 소파방정환선생기념건립위원회(위원장 김명윤)가 소파방정환선생기념사업회에 편입되었다.

1998
12월 26일, 소파방정환선생기념사업회의 명칭을 한국방정환재단으로 개칭하여 국가보훈처로부터 재단법인 한국방정환재단(이사장 이동원)으로 설립허가를 받았다.

1999
재단법인 한국방정환재단에서 <소파 방정환 문집>(하한출판사, 전 2권)을 발행하였다.

2015
5월 1일, 재단법인 한국방정환재단(이사장 이상경)에서 ‘정본 방정환 전집’ 선포식을 가졌다.

2016
12월,  국가보훈처는 ‘2017년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12명 선정. 방정환 선생은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는 등 일제 강점기 어린이에게 민족 자주정신을 심어주고자 노력. 어린이날을 기념해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2017
10월23일, 문화재청이 방정환 선생님 묘역을 국가의 등록문화재로 등재하였다.

2017
11월 25일, 2017 작은물결포럼 ‘정본 방정환 전집 미리보기’를 주제로 포럼을 개최하였다.

2019
5월1일, 방정환 탄생 120주년 기념 <정본 방정환전집> 출간(예정). (한국방정환재단 엮음,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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